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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뛰어든 케인시안…'부강한 모국' 평생의 사명이었다 2022-06-23 23:50
◆ 조순 前 부총리 별세 ◆
노학자의 손에서는 책이 떨어지는 날이 없었다. 올 들어 기력이 급격히 쇠약해졌을 때에도 경제학 원서를 정독하며 학문을 가다듬었고 하루도 빼지 않고 경제지를 읽으며 현실 경제 감각을 이어갔다. 경제학에 파묻혀 살다 이따금 피곤해지면 한시집(漢詩集)을 손에 들고 한학의 기쁨을 맛보며 노쇠의 고통을 잊었다. 한국 '경제학 거두'인 조순 전 경제부총리가 23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조 전 부총리와 인연이 닿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를 유연한 사고를 가진 케인지언(케인스학파 경제학자)이자 존경받는 관료, 아버지 같은 따뜻한 스승으로 추억한다.
1928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난 조 전 부총리는 경기고를 거쳐 서울대 상대에 진학해 처음 경제학을 접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듬해 입대해 6년 넘게 군 생활을 하다 전역해 육군사관학교에서 영어교관으로 교편을 잡았다. 이때 그가 가르쳤던 육사 생도 중에는 고(故)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도 있었다. 이후 1960년 서른두 살 나이에 혈혈단신 유학길에 올라 케인스 경제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그의 일생을 관통한 '가난한 모국을 부강하게'라는 소신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 군 생활을 했던 그는 탄막에 휩싸인 조국의 현실을 봤고, 가난한 모국을 일으키겠다는 일념으로 선진 경제학을 배웠다. 경제를 시장에만 맡기지 않고 재정정책 등을 통해 정부가 개입해 부흥을 이끌어야 한다는 케인스 이론에 끌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3년 만에 미국 보든대학 경제학부 과정을 마친 그는 조교를 하며 생활비를 벌 수 있었던 캘리포니아대(버클리)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조 전 부총리가 쓴 논문은 '후진국의 외자 조달 방안'이다.
뉴햄프셔주립대에서 교수 생활을 하던 그는 1967년 귀국해 20년간 모교인 서울대 상과대에서 강의하며 '경제학 불모지' 한국에 케인스 이론을 소개했다. 조 전 부총리로부터 케인스 이론을 처음 접한 제자들은 현대경제학에 매료됐다. 그가 1974년에 펴낸 명저 '경제학원론'은 지금도 경제학도들의 필독서로 통한다. 1970년대 말에는 중장기 개발전략에 관한 연구 보고서 작성을 주도했는데, 이 보고서는 1980년대 한국 경제정책 방향의 기초가 됐다. 그는 20년간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정운찬 전 국무총리와 김중수 전 한국은행 총재 등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조순학파'를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0년대 말에는 관료와 정치인으로 변신해 현실 경제에 뛰어들었다. 조 전 부총리는 육사 영어교관 시절 인연을 맺은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발탁돼 1988년 경제기획원 장관 겸 경제부총리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개혁이 없으면 민란이 일어난다"며 이른바 '토지공개념'을 도입해 토지제도 개편을 주도했다. 노태우 정권 말기 한국은행 총재를 지낸 후 정계에 투신했다.
조 전 부총리를 정계로 이끈 사람은 당시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1995년 제1회 전국지방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민선 첫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시장직에서 물러난 그는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와 단일화하면서 세운 한나라당의 초대 총재를 지냈다. 1998년 재보선에서 한나라당 강릉을 후보로 당선되기도 했다.
특유의 흰 눈썹 백미(白眉)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통했다. 하얀 눈썹을 휘날리며 산행을 즐겼기 때문에 서울대 교수 시절부터 제자들은 그를 '관악산 산신령'이라고 불렀다. 정·관계에 몸담았을 때는 청렴한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포청천'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정계를 떠난 이후 한반도선진화재단 고문,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 등을 맡아 사회 원로로 목소리를 냈고 최근까지도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로 재임하며 후학과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의 끝을 장식한 '직함'은 깨어 있는 지식인이었다. 그는 평소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는 건설적인 사회 비판"이라고 강조했다. 지식인이 비판을 위한 비판에 빠지지 않으려면 중용(中庸)에 나오는 학문의 요체를 익히는 게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즉 넓게 지식을 배우고(博學), 자세하게 의문을 제기하며(審問), 신중하게 생각하고(愼思), 자기 생각을 명료하게 설명하며(明辨), 독실하게 실행하는 것(篤行)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날카롭게 사회 문제를 비판하면서도 생각이 달라도 서로 다름을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사고를 키울 수 있다고 역설했다. 학문적으로도 개방적이었다. 그는 정부의 경제 개입 효용성을 믿는 정통 케인지언이었지만 밀턴 프리드먼을 비롯해 시장의 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신자유주의 시카고학파의 아이디어도 많이 수용했다.
한학자로는 논어 위정편(爲政篇)에 담긴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을 즐겨썼다. 가까운 이들에겐 특유의 담대한 필체로 쓴 사자성어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며 전통과 역사가 바탕이 된 다음 새 지식을 익혀야 제대로 된 앎을 이룰 수 있다는 소신은 그가 남긴 소중한 유산이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이며 발인은 25일 오전, 장지는 강릉 선영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남희씨(92)와 장남 기송·준·건·승주 씨가 있다.
▶▶ 조 前 부총리는…
△1928년 강원도 강릉 출생 △서울대 상과대 졸업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대학원 경제학 박사 △미국 뉴햄프셔대 조교수 △서울대 상과대 교수 △한국국제경제학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제17대 경제기획원 장관(부총리) △한국은행 총재 △이화여대 석좌교수 △제30대 서울시장(민선 1기) △제4대 민주당 총재 △제1·2대 한나라당 총재 △제15대 한나라당 국회의원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
[김정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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